와인을 사러 갔을 때 제일 당혹스런 경우는, 딱 한 가지 와인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고 갔는데 그 와인이 없을 때다.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잘 모르는 경우에는 이미 마음에 찍어둔 것 외에 다른 것을 사기가 쉽지 않고, 또 그렇게 샀다고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내 머리 속엔 미리 점찍어둔 와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니 그 대타로 들어온 와인에 대해서는 어지간해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 와인 뿐이랴. 물건을 사야 하는 대부분의 경우가 이럴 것이다.

2007/12/23 - [행복한 음식 얘기] - [와인] 크리스마스에 꼭 추천하고픈 '콜롬비아 크레스트 리슬링'

크리스마스에 마시면 정말 좋은 와인이라고 겁없이(!) 콜롬비아 크레스트 리슬링을 추천해 놨으니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 와인을 마셔야만 했다. 적어도 그래야 글 쓴 책임 정도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 코스트코에 가면 그 와인을 파는 걸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거리가 미어터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차를 몰고 코스트코까지 간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가 필요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정말 절박해서일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그나큰 와인 샵이 주변에 몇 개 있으므로 구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방심을 하고 말았다. 저녁 무렵 느즈막히 와인샵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작은 와인샵, 기대도 안했으니 없다고 해도 별 실망도 없었다. 옆으로 넘어가 롯데마트 안에 있는 와인 매장. 이것 저것 와인은 많은데 내가 찾는 건 없었고 찾기도 쉽지 않았다. 포기하고 롯데백화점 지하 1층에 있는 와인샵으로 갔다. 콜롬비아 크레스트라는 회사 이름만 꺼냈는데 취급하지 않는단다. 이제 남은 건 건너편 롯데캐슬 1층에 있는 레벵. 매일유업에서 하는 이 샵에는 비교적 많은 와인이 있어서 별로 걱정하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 와인은 없었다. 콜롬비아 크레스트가 있긴 한데 메를로만 있단다.

더 돌아다닐 시간 여유도 없고 해서 비슷한 와인을 골라 달라고 했다. 콜롬비아 크레스트 리슬링은 마셔본 적이 없다는 직원에게 나름대로 충분히 설명했다. '달아요, 달고 부드럽습니다. 향기는 단데 첫 맛은 그리 달지 않고, 나중에 올라오는 느낌이 또 달아요. 가족들하고 마실 거니까, 드라이한 것 말고 스위트한 걸로, 단 걸로 주세요'라고 나는 열심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잘 알았다는 듯이 매장에 있는 분은 굳이 미국 와인이 아니어도 괜찮다면 독일 와인이 어떠냐면서 골라준 것이 바로 오늘 애기할 이 녀석, 닥터루젠 리슬링 Dr. Loosen Riesling 2006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병이 참 잘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충분히 설명했으니 단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저녁, 이 녀석을 땄다. 잘 생긴 코르크가 매끄럽게 빠져 나오는 느낌이 좋았고, '뻥'하는 소리도 경쾌했다. 금빛이 은은하게 도는 와인을 잔에 가득 따르고 급한 마음에 향부터 들이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건 내가 애당초 기대했던 향이 아니다. 한 모금 입에 넣으니 살짝 탄산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레드 와인에 비하면 확실히 달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했던 그런 달콤한 맛도 아닌, 흔히 말하는 드라이한 느낌이 다가왔다. 어랏? 내가 요구했던 건 이게 아닌데...

일단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드니, 닥터루젠의 본 맛을 깨닫기도 전에 마음 속에서 불평이 올라왔다. 콜롬비아 크레스트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술을 잘 못하는 가족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배려, 이런 것들 때문에 달콤한 와인을 찾았는데 달콤하다기 보다는 달콤 쌉싸름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와인에서 그 쌉싸름한 맛을 빼버린다면 그게 주스지 와인일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단순히 와인을 추천받는 것과, 내가 마음에 둔 와인이 없어 대타로 다른 것을 추천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걸 알았다. '맛'이라는 것이 주관적인 것일진대, 나의 경험과 인상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로부터 비슷한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내가 기대했던 와인이 없으면, 그 와인과 전혀 다른, 그런 와인에 도전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옛 와인에 대해 미련을 덜 갖고, 새 와인에 대한 선입견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긴, 어찌 생각하면 와인만 그럴 것인가. 우리네 삶도 다 그런 것은 아닐까.

닥터루젠 리슬링 / 8.5도 / 2만6천원 / 보통의 달콤함과 쌉싸름함, 약간은 모자란 알콜 도수 / 샵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브랜드라고 추천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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