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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9 엄지손가락이 하는 일 (17)

엄지손가락이 하는 일

사랑하며 사는 삶 2008/03/19 21:06 Posted by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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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 손가락을 다쳤다. 다친 과정도 참 황당하다. 폴더형 휴대전화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고 폴더를 닫는 순간 어느 부분이 그랬는지도 미처 깨닫기 전에 엄지 손가락 옆이 푹 베어버렸다. 내가 쓰는 휴대전화가 레이저라서 그런가, 하긴 광고에서는 축구공도 반쪽을 내버리던데 손가락 하나 베는 건 일도 아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휴대전화를 들고 봐도 손가락을 베어버릴 만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그러데 나는 손을 벴다. 이건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새벽 녘에 손을 베었는데 아침이 될 때까지 피가 멎지 않아 은근히 걱정도 됐다. 하지만  물이 닿지 않게 꽁꽁 싸매고, 약을 열심히 발라준데다가 항염 효과가 있는 약까지 먹어댔더니 그나마도 빨리 아물었던 것 같다. 대신 만 하루가 넘도록 왼손을 제대로 씻지 못해 찝찝함이 아주 끝장이다.

나는 왼손잡이는 아니지만, 왼손과 오른손을 거의 비슷하게 쓰는 이른바 양손잡이인 까닭에 왼손을 다친 여파가 만만치가 않다. 평소에는 엄지 손가락이 무엇에 쓰이나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정작 다쳐 놓으니 엄지 손가락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엄지 손가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가장 불편한 건, 바로 옷 입을 때다. 절대적으로 단추 끼우는 일은 엄지 손가락 몫이다. 엄지 손가락 없이 단추 끼우는 건 거의 노동이다. 거기에 양말을 신고, 속옷을 입고, 바지를 올리는 과정에서도 엄지 손가락이 아주 주도적인 일을 한다.

라이터를 켜는 일도 쥐약이고 - 난 담배를 피지 않지만, 사무실에 아로마 램프를 켜느라 가끔 라이터를 쓴다 - 병 뚜껑 따는 일도 만만치 않다 - 이건 내가 병 뚜껑을 왼손으로 따기 때문이다 -. 아무 생각 없이 힘줘서 병을 따다가 아물어 가는 상처를 건드려 또 피가 배어나왔다.

사람이건 다른 생물이건, 아니면 또 어떤 요소건... 거기에 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게다. 그런데 사람들은 옆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존재하는 이유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주 편하고 쉽게 대할 수 있기 때문에 정작 그 역할을 잊는 일,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난데없이 엄지손가락에 미안함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지금, 엄지 손가락이 어여 낫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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