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고딩은 어쩔 수 없는 고딩인 법. 학교 때려치고(정확히 말하면 짤리고) 집에 가서 사실을 실토하기가 두렵다. 몇 일 호텔 방에 묶으며 시간을 죽여 보려 하지만 - 마침 돈은 좀 있었으므로 - 아무도 그와 함께 시간을 죽여주지 않는다.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워, 창녀를 사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별 신통찮다. 옛 여친을 다시 만나고, 착한 동생을 찾아 몰래 집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결국은 뭐! 돈 많은 집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사게 된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인터파크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이 책. 나 대학 다닐 때만해도 명작 선집 리스트에 없었던 이 책이 왜 검색 순위 1위인 것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길래.
그런데 나중에 누군가 들려주는 얘기로는, 이 책이 어떤 방송 프로그램의 소품 비슷하게 쓰였던 모양이다. 내가 가르치는 고등학생 중에서도 읽은 애가 있을 정도니 꽤 알려지긴 했나보다. 물론 이 책 얘기를 했더니 그 녀석은 아우 이 책, 거의 왕짜증이에요, 라는 분위기를 연출했지만서도. 논술 대비해서 읽으라는 책이었던가 본데, 명작을 이렇게 읽으면 나중엔 다시 명작을 쳐다보기도 싫어지는게 뻔한 일 아닐까.
여튼, 이 책은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의 방황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뭐, 내 식으로 따지면 성장통 소설이라고 해야 겠다. 성장하는 게 꼭 아픈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성장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죄다 뭔가 아픔을 안고 있으니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난 저렇게 치열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정말 마음 놓고 얘기할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웠던 적은 있었던 듯 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 입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한 때는 첫 사랑이었던 그 누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길거리를 마냥 쏘다녔었겠지.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달래기엔 결국 마음 맞는 친구가 최고였다는 뻔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 크던 작던, 그 나이 때를 자라는 사람들에겐 아픔이 있는 법일 게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착한 동생인 피비에게 고백하는 미래의 소망이다. 호밀밭을 지키고 있다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잡아주는 일, 그게 그의 소망이다. 학교에서 짤린 녀석 치고는 꿈은 참 선하다. 어쩌면 그 역시 자신의 추락을 잡아주는 누군가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치열한 삶을 살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공부를 한다. 기업은 창의적인 인재를 찾는데, 학교는 획일화된 시스템으로 공부 기계만을 만들어 낸다. 그들의 아픔은, ‘대학 가면 다 끝나는 거야'라는 말로 묻혀 버린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는 정말 이렇게 묻어버려야만 하는가. 벌써부터 밀려드는 숙제 때문에 11시가 넘어도 책상 앞에 매달려 있는, 이제 6학년이 되는 딸 아이를 보며 대한민국의 아빠가 이렇게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난 오늘도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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